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문단 편집) == 공비 추적 및 소탕 과정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f0083218_50f4f20675f91.jpg|width=100%]]}}}|| || [[UH-60| 블랙호크 헬기]]에 탑승하는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요원들. 평소와는 달리 검정 베레가 아닌 방탄모를 착용하고 있다. || [youtube(XijIrsUs790)] [[제36보병사단|36사단]]을 비롯한 인근 육군 보병사단과 해당 지역 동원예비군은 물론 최정예 특수전 전력인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병력도 상당수 투입되었으며, [[대한민국 해군|해군]] 역시 [[제1함대(대한민국 해군)|1함대]]와 [[해군작전사령부]]에서 함정 23척 지원은 물론 지상전력으로 [[해병대 제1사단|제1해병사단]]에서 출동한 수색대 및 보병 병력을 동원했으며 [[해군 특수전전단]] 병력도 [[진해]] 및 [[동해]]에서 급파해 동원했다. [[대한민국 공군|공군]]에서는 [[제18전투비행단|18전투비행단]]과 [[공군작전사령부]]에서 항공기 76소티[* 단순한 이착륙 훈련을 제외한 항공작전 1회 = 1소티이다. 그러니까 정찰, 수송지원, 항공지원등의 항공작전을 76번 했다는것.] 지원 등이 있었다. 일일 지상작전투입병력 평균 43,000여명, 연인원 총 150만명에 달하는 육/해/공 대규모 작전. 게다가 [[대한민국 경찰청|경찰청]]도 [[경찰청 의무경찰|전투경찰]]들로 구성된 타격대와 기동대 등을 대거 투입하였고 파출소 근무 경찰관도 [[기동복]] 입고 [[M16 소총]]을 휴대했다. 이 때 이광수 체포조 등 일부 경찰들이 [[M1 카빈]] [[소총]]으로 무장했다는 사실을 안 경찰청에서 급히 경찰 내 [[K2 소총]]들을 긁어모아 강원지방경찰청 산하에 급히 뿌려서 교체해 주었고, 본의 아니게 강원청은 전국 지방청들 중 K2 보유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되었다. 이후 9월 18일~9월 30일에 걸쳐 차단선을 구축하였고, 곧이어 아군에 의해 남은 북측 공비들에 대한 수색 및 섬멸 작전이 전개되었다. * 9월 19일 10시 경, 단경골 일대에서 특공연대에 의해 20여분간 교전이 발생했다. 이때 공비 3명 사살되었다. * 같은 날 14시 경, 칠성산 일대에서 특전사 3여단 병력이 적 3명과 접촉하였다. 공비들은 투항유도에 불응하였고, 전원 사살되었다. 투항 유도 중 사살에 이르기까지는 여러가지 가설이 존재하나 대체적으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가설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전사 3여단 모 지역대는 칠성산 9부 능선 일대에서 은신한 3명의 공비를 먼저 발견하여 지근거리까지 포위를 완료하였고, 대대장에게 이에 대해 무전 교신을 한 결과, 지역대장은 공비에 대한 생포/사살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았다. 곧 지역대장이 "자수하라, 옷을 벗으면 살려주겠다."고 외쳤으나 대답이 없었고 공비 중 한 명이 "지역대장 동지 들어오시오"라고 소리쳤다. 이에 지역대장이 "상의를 벗으면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상의를 벗고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열부터 하나까지 숫자를 세기 시작하였는데, 셋까지 세었을 때 누군가 사격을 개시하였고, 이는 지역대원들의 동시 집중사격으로 이어졌다. 공비 3명 사살. * 같은 날 16시 경, 오이골 일대에서 X사단 병력과 교전하여 적 1명 사살. * 9월 21일 9시 30분, 칠성산 정상에 특전사 X여단 X대대의 제 4중대가 헬기레펠로 투입되어 3인 1개조를 이루어 하향식 수색을 실시하던 중에, 그 중 한 수색조의 선두에 있던 대원이 매복하고 있던 적(정찰조 2명)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으나 장전이 안된 상태라서 응사가 제한되자 "적이다!"라 외치며 몸을 굴려서 옆에 절벽 아래로 3미터 추락하였으며, 뒤이어 오던 이병희 중사가 즉각 응사하는 순간 적에게 두부관통상[* 이후 국군 헬멧도 미국의 PASGT 헬멧과 같은 형상으로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이병희 중사는 머리에 총상을 당하면서도 연사로 무장공비에게 끝까지 총을 쏴서 '역시 특전사' 라는 평을 받았다.]을 당했고, 맨 뒤에 있던 세번째 대원이 즉각 엄폐하여 응사를 실시했으나 적은 상호 엄호하며 도주하여 사라졌다. 전과 없음. 아군 이병희 중사 1명 전사.[* 당시 사건에 대해서 언론에서는 헬기 레펠 실시 중 200m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공작원의 보통 [[M16 소총]]에 [[저격]]을 당하여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어 이들의 사격능력이 초인적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첫번째로 적의 공격에 의한 전사자가 나온 날이었다. 당시 참가한 특전사의 후기를 보면 이병희 중사는 머리에 총상을 당하고도 수술실에 실려갈때까지 특전사 교육 받은대로 의식을 잡기위해 계속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고 한다. 팀 후배가 쓴 증언글에 의하면 안타깝게도 그 날은 그가 여자를 소개받기로 한 날이었다고 한다. 여하튼 최정예 특수부대원이 적의 사격에 전사한 것은 사실이기에 군과 국민에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 같은 날 20시 경, X사단 X연대와 예하 수색중대가 매복작전 중 모 아군병사가 어둠 속에서 적과 접촉하여 수하하자[* 매복 작전은 접적상황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전방에 움직이는 대상이 감지되면 수하를 시도하는게 아니라 우선적으로 사격을 해야한다. 하지만 이러한 실전을 치러본 적이 없었기에 나온 잘못된 대응이다.] 적은 멈칫 하더니 옆의 나무에 엄폐를 하였고 뒤늦게 적임을 인지한 아군 병사의 사격으로 1차 교전 시작. 적의 수류탄 및 단발사격 공격으로 아군 1명 전사, 1명 부상. 이후 자정이 넘은 시점 인근 매복지에서 적의 대화소리[* 남은 탄환의 수를 묻는 대화였다고 진술함. - 대침투 작전사 교범에서 발췌.]에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사격을 가해 2차 교전, 이후 적을 다시 발견하여 3차 교전 결과 적 1명 사살, 아군 2명 부상, 최종적으로 적 1명(대위 김연호) 사살[* 국군은 무장공비 김연호 대위의 얼굴 정중앙을 노렸으나 김연호 대위가 고개를 돌렸고 뺨에 명중되어 뒷통수를 관통해서 사망했다.]. 총 아군 1명 전사, 3명 부상.[* 21일에서 22일로 넘어가는 밤에 벌어진 교전이라 22일 교전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시간대가 확실하지 않다.] * 9월 22일 6시 40분 경, 칠성산 일대에서 X사단 X연대가 차단 작전 중, 적을 발견했다. 지근거리까지 유도에 성공했으나, 적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교전을 벌였고 적 1명(중좌 정영구)을 사살했으며[* 정영구는 국군이 던진 [[수류탄]]에 맞아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교전 중 적의 뒤를 점하려고 뒤로 돌던 아군을 감지한 적의 응사로 인한 두부 관통상으로 아군 1명(상병 강정영)이 전사했다.[* 21일 밤 ~ 22일 새벽까지의 교전 기록은 여러 커뮤니티에 나온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가장 정확한 기록은 국방부에서 발간하는 '대침투작전사'의 내용이지만 해당 내용은 대외비이므로 상세한 내용이 넷상에 공개되지는 않았다. 본문의 경우 9월 21일 ~ 22일 교전에서 벌어진 과정에 대한 내용은 어느정도 맞는 편이지만 교전들의 순서가 약간 오류가 있어보인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6/nwdesk/article/2001583_30711.html|당시 보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이 사건을 다룬 내용에 당시 참전한 병사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 매복할 때 공비들이 다 젊은 사람들이라고 듣고 올라가서 중년인 정영구 중좌를 조우했을 때 대한민국 주민인 걸로 착각, 잠깐 방심한 사이 정영구가 권총을 쏘아 강정영 상병이 두부관통상을 입고 그 직후 함께 매복했던 동료가 수류탄을 투척해 정영구를 폭살시켰다고 한다.] * 9월 23일 6시 30분 경, 칠성산 일대에서 정상 방향으로 수색작전을 전개하던 중 공비와 조우, 교전 중 아군 2명 중상. 그 중 한명은 이틀 후인 25일 전사(상병 김대영). 같은 시각 민간인 안상영 씨가 송이버섯을 따러 작전구역에 들어왔다가 국군에게 오인사살당한다. * 9월 28일 6시 30분 경, 보광리 일대 무명고지에서 X여단 X대대 X 중대 병력이 매복 중 적 1명을 발견하여 생포를 목적으로 유인하였다. 생포하려는 도중에 적이 권총을 뽑으려고 하자 총격을 가해 사살하였다. 이 사람은 부함장 유림 이었다. 적 1명 사살. * 9월 29일 20시 경, 고성군 간성읍 진부리에서 매복 중이던 한대성 병장이 무단이탈을 했다가 국군 오인 사격으로 사망하였다. 아군 1명 전사. 사격한 대위는 형사 입건되어 벌금 100만원 선고 * 9월 30일 16시 경, 목계리 일대에서 공비들을 수색하던 특전사 X여단 X대대 X 중대 병력이 인근 산의 정상에서부터 하향 수색하며 내려오고 있었다. 마을 인근까지 내려와 옥수수밭에 이르자 대원 1명이 옥수수단 속에 손을 집어넣었고 안에 무엇이 있음을 느껴서 옥수수단을 헤치자 은거하고 있던 적이 노출됐다. 순간 대원들은 사격자세를 취하고 투항을 권유했으나 공비가 권총을 빼들자 특전사 대원들이 사격을 실시해서 사살했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66401|KBS]] 및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1828_19466.html|MBC]] 보도자료 참고. 관련 군 교범에는 다른 진술도 함께 수록했다. 여기에서는 공비가 아군이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서 먼저 총을 겨눴고, 이후 상호 대치상태로 있다가 서로 물러서자고 말하는 과정에서 공비가 순간 방심한 틈을 타 사살했다고 나온다.] 공비 1명(소위 리철진) 사살. * 이 시점까지 육군 특전사, 특공연대, 보병사단 병력과의 교전으로 공비 11명을 사살한다. 한편 북한 정찰조원 3명 중에 생존한 2명은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다. * 10월 3일~7일까지 용평 스키장과 월정사 일대를 통과했다. * 10월 8일 14시 경, 평창군 탑동리 일대에서 산나물을 채취하기 위해 산을 오르던 민간인 3명을 살해했다. * 10월 9일 21시, 오대산 일대에서 아군 매복조와 30여분간 대치 상황을 벌이다 이탈하였다. * 10월 12일, X군단 사령부를 촬영 및 감시하였다. * 같은 날 20시 40분 경, 연곡면에서 매복작전을 하던 도중 홍동진 대위가 아군 병사 김 모 상병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했다. 김 모 상병은 무혐의 처분 * 10월 14일 20시 경, 인제 지역 일대의 민가와 자동차에서 식량 등을 절취해 취식하였다. * 10월 16일, 신남에서 인제 방면으로 차량 이동 중이던 학교 교사에 의해 그들이 도로를 따라 가던중 발견되었다. 아군 5분대기조가 출동하나 합동신문조는 그들을 인부나 근처에 살던 주민들로 판단하였고 대공 용의점이 없는 것으로 분석하여 접촉 기회를 상실하였다. 정찰조는 이때 도주로를 바꿔 남쪽으로 도주 후 다시 북상하였다. * 10월 20일, 소양호를 수영으로 도하하였다. * 10월 22일, 양구와 인제 일대 모 사격장 근처에서 싸리나무를 벌목하던 2사단 표종욱 일병을 살해한 뒤 전투복 등을 절취하였다. * 10월 25일, X사단 X연대를 촬영했다. * 아군은 이들과 한동안 접촉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나, 마침내 11월 4일 15시 경에 산머리곡산 일대에서 동계작전을 준비 중이던 아군 X사단 X연대 병력에 의해 발견되었다. [[http://www.army.mil.kr/army_catalog/297/data/062.PDF|참고자료-육군지 제297호]] [[http://blog.daum.net/happilychoi/65|참고자료: 당시 3군단 항공단장 최해필 대령(최종계급 소장)의 회고록 발췌, 아래쪽 1/3 분량이 당시 이야기이다.]] * 11월 5일 4시 20분 경, 인제군 북면 용대리 자연 휴양림 입구에 있는 연화교 매표소 통나무집에서 매복하고 있던 아군 매복조와 교전하여 적군과 아군 각각 한명씩 상흔을 입었다. 특공연대 소속 매복조 2명이 거수자를 확인하고 수하하였으나, 거수자는 수하에 응답하지 않고 "703이냐? 3대대 [[선임하사]]다. 몇 대대냐?"라 대답했고, "3대대 선임하사인데 어두우니 나와서 얘기해라."라고 하면서 계속 접근했다. 매복조는 3대대는 이미 부대가 이동을 마친 후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를 이상하게 여겼으나 분명한 확인을 위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접근하는 거수자가 방탄모를 착용하지 않았고, [[M16 소총]]으로 무장한 것을 보고(703연대는 M16을 사용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공비라는 것을 확신하였고, 노리쇠를 전진시키며 쏘라고 외쳤다. 공비도 동시에 장전하면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사격은 통나무 집에 있던 아군 매복조에 의해 선 실시 되었으며 공비 2명도 수류탄과 소총 사격으로 맞선다. 교전 과정에서 매복조의 송상홍 상병이 수류탄에 의해 다리에 파편상을 입었으나 이때 공비 1명도 다리에 총상을 입어 숲으로 도주했다. 이후 부상당하지 않은 적 1명이 보복 공격으로 근접하여 초소 창문을 향해 난사하였으나 뒤에 있던 아군은 중간벽에 의해 무사하였다. * 같은 날 6시 48분 경, 정보분석조와 합동신문조가 교전 현장 일대에 도착하여 작전을 토의하던 중 직접 현장으로 올라가기로 결정을 내린다. 이때 부하 장교가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3군단 기무부대장 오영안 [[대령]][* [[육군3사관학교|3사]] 4기 - 이 사건에서 아군측 최고위 전사자가 되었다. 전사 후 [[준장]]으로 추서되었다.]은 강행하여 올라간다. 현장을 살피던 도중 기무부대장이 적의 예상도주로를 향해 불을 비춘 순간 그곳에 숨어있던 적의 저격으로 오 대령을 포함한 간부와 병사들이 사상당한다. 몇 분 뒤 부상을 당한 병력 후송을 위해 이동 중이던 의무 병이 무장공비 사격으로 부상을 당하였으며, 이를 구출하기 위해 추가로 이동하던 정보장교(서형원 [[대위]])가 전사. 이로써 기무대장 오 대령을 포함한 아군 전사 2명, 부상 8명 발생. * 같은 날 7시~9시 경, 특공연대가 퇴로를 차단하고 압박 작전을 펼쳤으나 안갯 속에서 계속 된 적의 조준 사격으로 아군 피해 누적. 1명 전사 6명 부상. * 같은 날 10시 경, 아군의 압박작전 속에 특전사 3여단의 장선용 상사가 배후에서 접근하여 '''마지막 무장공비인 정찰조원 2명을 사살'''. 이로써 길었던 대간첩작전은 '''개시 49일만에 종료'''된다.[* 최초엔 26명이 침투한 것으로 발표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다면 아직도 1명이 남아 있는 셈이지만, 26명이라고 최초 진술했던 이광수가 나중 진술에선 26명인지 25명인지를 헷갈려했고, 잠수함 내부에서 발견된 개인 물품이 25명 것밖에 없었으며, 파악된 25명을 제외하면 수십일간의 도주 및 생존과정 등에서 나오기 마련인 흔적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군당국에선 실제 인원을 사실상 총 25명으로 보게 되었고 그에 따라 2명을 마지막 남은 공비로 특정시켰으며 그 2명을 사살하자 공비소탕이 모두 해결되었음을 공식 선언하고 작전을 종료하였다.] 이날 교전 중 총 3명 전사 14명 부상.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f0083218_50f4f20acd944.jpg|width=100%]]}}}|| || 최후의 공비인 정찰조원 두 명을 사살하여 대간첩작전을 종료시킨 특전사의 장선용 [[원사(계급)|원사]](당시 [[상사(계급)|상사]]).[* 이 공로로 충무무공훈장을 수훈받았다. 참고로 이후 장선용 원사는 2005년, 50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하였다. 아래의 북한 정찰조원 시신이 한국군 군복을 입고 있는 이유는, 후술할 2사단 표종욱 일병을 죽이고 뺏어 입었기 때문이다.] || 1996년 당시 군에 복무했던 현역 장병이나 작전에 투입되었던 예비군들의 생생한 체험담들도 여기저기에 올려져 있다.[[https://www.instiz.net/pt/4064366|체험수기 1]] [[http://blueheart.egloos.com/2558321|체험수기 2]] [[http://horrorstory1.tistory.com/314|체험수기]]가 하나 더 있었지만 창작이 가미되었거나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짜집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기억을 그대로 두서없이 주섬주섬 적어서일 수도 있지만 몇몇 사실 관계에서 오류가 보인다. 가령 출동 일시는 뙤약볕이 내려쬐는 8월이 아니라 9월이었는데 출동한 인원이라면 그 날짜를 잊기가 어렵다. 왜냐면 출동날짜가 추석 바로 전날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용으로 봐서 노도 부대 인원일 가능성이 높은데 노도부대쪽은 덥다. 또한 실제 그 부대 인원의 말로는 도로 검문 같은 임무가 아니라 숙영지에 도착하고 나서 바로 작전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검문은 통상 그 지역의 부대가 맡는 법이다. 타 주둔지 병력을 그것도 예비사단 병력을 보름씩이나 그 지역 검문을 맡길려고 출동시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본문내용의 교전일은 22일로 출동 후 4일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 전사자의 성이 바뀌는 것도 그러하다. 전사자의 성이 내용 진행 중에는 내내 김 씨로 나오다가 마지막에 송 씨로 바뀐다. 같은 부대에 속해있지 않았던 다른 부대의 병사들도 전사자의 이름까지는 기억을 못해도 성씨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상식적으로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 전우의 성씨를 오락가락할 수도 있다는 게 믿기 어려운 부분이다. 또한 위문품의 경우 개별 중대에 직접 전달하는 경우는 없었다. 언론의 전과 보도에서 '몇대대 몇중대에서 사살' 같이 중대 단위까지 보도하는 경우는 없었고 연대 단위의 'OO부대에서 공비 x명 사살'로 보도하게끔 기무사의 보도관제가 이루어졌으므로 위문품들이 직접 개별 중대로 향할 일은 없었다. 위문품들은 연대에서 전부 취합해서 각 개별 부대로 정기적으로 분배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위문품 불출이 늦어져서 연대본부 주둔지에 위문품이 쌓인 채 썩어가는 일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가 지적되어서인지 게시물이 삭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